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잠실 일대에 초대형 종합운동장을 짓겠다는 계획은 [[박정희]] 대통령 시절 1976년 9월에 나왔다. 당시 박 대통령이 [[구자춘]] 당시 [[서울특별시장]]에게 잠실지구에 초대형 육상경기장, 야구장, 실내체육관 등을 지으라는 지시를 했는데 이것이 잠실운동장 계획의 첫 등장이다. 그러나 예산 부족으로 계획 발표와 동시에 착공까지 이뤄지지는 못했으며 1976년 말 [[서울특별시 학생체육관|잠실학생체육관]], [[잠실실내체육관]], [[서울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]]부터 공사를 시작했고 [[서울올림픽주경기장|주경기장]]은 1977년에 착공했다. 야구장은 [[김재박]]의 개구리 번트와 [[한대화]]의 결승 홈런으로 유명해진 [[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/1982년|1982 세계야구선수권대회]]를 유치하기 위해 신설 계획이 만들어졌다. 야구장은 잠실종합운동장 중 가장 마지막에 착공됐는데 1980년 4월 17일에 공사를 시작했다. 1977년 착공한 주경기장보다 3년이나 늦게 공사가 시작된 것은 예산 부족 문제를 비롯해 여러 사연이 있었다. [[서울특별시]]는 당시 야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아니란 점 등을 근거로 야구장 건립을 미뤘고 이로 인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개최권 반납 등의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했다. 그러다 [[1984 LA 올림픽]]에서 야구가 시범종목으로 재채택되어[* 야구는 [[1964 도쿄 올림픽]]까지 시범종목이었다가 다시 없어진 상태였다. 이후 [[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]]부터 [[2008년 베이징 올림픽]]까지 정식종목이었다가, [[2020 도쿄 올림픽]] 때 임시적 정식종목으로 다시 채택된다.]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건립 계획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. 당시 예산으로 126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지었고 건축가 김인호가 설계, [[현대건설]]이 공사를 맡았다. 야구장은 잠실에 들어선 야외 경기장 중 가장 늦게 착공했으면서도 가장 먼저 준공됐다. 1982년 7월 15일 준공된 이 경기장의 첫 공식 경기는 [[KBO 리그|한국프로야구]] 경기가 아니었다. 애초에 이 야구장은 프로야구를 염두에 두고 지어진 것이 아니라 [[야구 월드컵|세계야구선수권대회]]와 [[1988 서울 올림픽]] 등 '''아마추어 야구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지어진 구장'''이었기 때문이다. 이 때문에 후술하게 될 여러 시설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. || [[파일:external/timetree.zumst.com/dcc82ca983834b6ca69dc8a543373686.jpg|width=100%]] || || '''축)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준공, 2년 3개월만에 끝낸 대야심작!'''[br]준공 직후의 모습. 참고로 외야의 등받이 없는 관중석은 [[서울올림픽주경기장]] 3층에 아직도 남아 있다. || [youtube(GJEcZ97coI4)] 개장 기념 경기는 [[경북고등학교 야구부|경북고]], [[부산고등학교 야구부|부산고]], [[천안 북일고등학교 야구부|천안북일고]], [[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|군산상고]] 등 당시 고교야구 대회 정상급 4개 팀들을 초청한 우수고교 초청 야구대회였다. 이 대회 결승전에서 경북고 [[류중일]](전 [[LG 트윈스]] 감독)이 부산고 에이스인 [[김종석(1964)|김종석]](전 [[롯데 자이언츠]] [[투수]])을 상대로 친 솔로홈런이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1호 홈런으로 기록됐다. 개장 기념 프로경기는 8월 1일 [[롯데 자이언츠]](원정)와 [[MBC 청룡]](홈)과의 경기였다. 결과는 6대3으로 롯데의 승리. 두번째 경기는 9월 22일 [[OB 베어스]](원정)와 [[롯데 자이언츠]](홈)와의 더블헤더 경기였으며, 1차전은 3대4로 롯데 승리[* [[박철순]]이 연승 행진을 22연승에서 마감한 경기였다.], 2차전은 6대 2로 OB 승리. 참고로 1982년에는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프로 경기를 시범 차원에서 단 3경기만 배정했다. [[MBC 청룡]]이 본격적으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홈으로 쓴 건 1983년부터였다. 1983년 4월 2일 개막 경기에서 OB를 상대로 7대 0으로 패배하였다. 1986년부터는 [[OB 베어스]]가 [[동대문야구장]]을 떠나 이 야구장에 상주하게 되면서 [[MBC 청룡]]과 [[OB 베어스]]의 '''한 지붕 두 가족''' 생활이 시작됐다. 이후 [[1988 서울 올림픽]] 때도 야구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어 이곳에서 진행하였다.[* 서울 올림픽 당시 선수로서 잠실야구장에서 경기를 뛰고 2022년까지 잠실야구장에서 경기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다. 올림픽 당시 [[단국대학교 야구부|단국대]] 3학년 학생이었고 2022 시즌까지 [[두산 베어스]] 감독을 역임했던 [[김태형(1967)|김태형]].] [[파일:attachment/김동엽/12.jpg]] [[MBC 청룡]] 홈 구장 시절. 불꽃같은 쇼맨십으로 유명했던 [[김동엽(1938)|김동엽]] 감독이 [[김용수]] 선수(LG 영구결번)와 함께 치어리더들과 춤을 추고 있다. 1980년대에는 [[MBC 청룡]]과 [[OB 베어스]]가 이 야구장을 홈으로 쓰면서도 훈련을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역사가 있다. '''선수들이 무리하게 뛰면 [[잔디]]가 손상된다(...)'''는 [[전시행정|어이없는 이유 때문이었다.]] 오죽하면 선수들이 훈련을 해야 할 시간에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들어오면 선수들을 쫓아냈고 타석이 있는 홈플레이트 구역에 트럭을 세워놔서 타격 훈련을 못하게 막는가 하면 선수들이 공을 잡아야 할 외야 그라운드에는 시설관리원들이 쭈그리고 앉아서 잔디 속 잡초를 손으로 뜯는 기괴한 장면이 등장했다. 이 때문에 당시 [[MBC 청룡]] 선수단은 홈경기를 앞둔 상황에서도 연습구장으로 빌려쓰던 [[더샵 스타시티|건국대학교 야구장]]에서 연습을 하고 잠실야구장으로 오는 고생을 해야 했다. 이같은 블랙 코미디는 1990년대가 돼서야 사라지게 된다. 잠실야구장이 획기적 변화를 맞게 된 것은 2000년부터였다. 개장 이후부터 1999년까지는 [[서울특별시]]가 이 경기장에 대한 소유권과 운영권을 모두 쥐고 있었고 홈팀인 [[LG 트윈스]]와 [[두산 베어스]]는 서울시에 단기 대관 신청을 해서 야구장을 빌려 쓰는 처지였다.[* 현재 [[키움 히어로즈]]가 [[고척 스카이돔]]을 일일 대관해서 쓰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. 그나마 LG와 두산은 일일 대관보다는 조금 긴 단기 대관 형태로 경기장을 빌려썼다.] 그러나 프로야구의 자립 기반 확립을 위해 지자체가 프로야구단에게 야구장을 장기 위탁 임대해야 한다는 여론이[* 이와 별도로 [[LG 트윈스]]는 장기 위탁 여론이 나오기 전에 [[뚝섬 돔 경기장|서울 뚝섬에 자체 돔구장을 만들겠다]]는 야심찬 꿈을 꿨으나 [[1997년 외환 위기]]의 여파로 무산됐다.]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커졌고 결국 2000년부터 LG와 두산이 서울시와 계약을 맺고 장기 위탁 형식으로 야구장 운영 일부를 주관하게 됐다. LG와 두산이 야구장 운영에 관여하면서 [[GS25|LG25 편의점]], [[버거킹]] 등 두 구단의 모그룹이 운영하는 각종 프랜차이즈 점포가 야구장 내 매점구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. 또 2000년대 초반에는 기존의 불편했던 의자들을 철거하고 새로운 의자를 설치하는 등 관람 환경 개선에도 나서게 된다. 현재의 그라운드 형태를 갖춘 것은 2007년이었다. 덕아웃의 규모를 넓히고 [[불펜]]을 덕아웃 옆 반지하 공간으로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됐다. 이 공사 이후 [[오클랜드-앨러메다 카운티 콜리세움]]처럼 극단적으로 넓었던 내야 [[파울]] 지역이 좁아졌고 파울타구에 맞을까 두려웠던 각 팀 투수들이 안전하게 몸을 풀 수 있게 됐다. 2014년에는 내야 파울지역 일부에 익사이팅 존 좌석을 신설해 팬들이 더 가까운 자리에서 선수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